큐어 후기
악마같은 사람이 살인자가 되는게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도 얼마든지 살인자가 될 수 있고 그 살인의 계기는 사소한 불만일수도 있다는 시선이 담긴 영화. 이렇게 한줄로 적고 나니까 반발심이 드는 주제인데 영화를 보면 또 그럴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최면이란 판타지적인 소재를 차용했지만 묘한 현실감이 있다.
주제가 주제라 그런지 도입부가 충격적이다. 웬 남자가 생활을 하다가 어떤 계기나 신호탄 없이 살인을 한다. 그리고 살인하면서 뒤집어 쓴 피를 욕실에서 씻어내는데 그 모습이 아침 출근을 준비하는 것 같다. 살인 과정부터 현장에 출동하는 주인공이 나오기까지 내내 쌈마이하게 귀여운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잔인한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깔아 충격을 주는 연출은 많이 봤지만 이 장면은 노래 톤이 정말 가벼워서 충격적이었다. 일상에서 살인으로 넘어가는 구간이 스무스해서 충격적이었던것처럼 모든게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중간에 파출소 경찰이 동료를 죽이는 장면도 무서웠다. 평화로운 아침을 보내다가 당연한 일을 하듯이, 루틴을 따르듯이 살인을 해서 충격적이었다. 카메라를 와이드로 밀어서 끔찍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연출한게 독특했다. 와이드 화면, 정적이고 평이한 앵글, 왔다갔다하는 등장인물을 따라가듯 가로로 움직이는 시선, 자주 나오는 원테이크씬... 이런 요소들이 연극적이란 인상을 줬고, 이런 멀리서 바라보는 연출들로 일상과 폭력의 경계를 허무는 주제를 잘 표현한거같다.
서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만이나 신경전 묘사도 섬세하게 잘했다. 여성의사가 남성환자를 진료하려고 바지를 내리게 했더니 환자가 "과감하시네요"라고 한다던가. 파출소는 금연구역이라서 담배를 피면 안된다는 말을 동료가 했는데 그 다음에 바로 담배를 핀다던가. '술을 주는게 낫지않겠냐'는 말에 '커피면 돼' 라고 대답한다던가.. 사소한 신경전을 단서를 던지듯 툭툭 보여줘서 재밌었다. 상호작용 신호들에 예민한편이라 이런 장면들 잔잔하게 스트레스받았음ㅋㅋㅋㅋㅋㅋ이 숨막힘...감독의 의도였겠지...?ㅎㅎㅎ
후반부부턴 <퍼펙트블루>처럼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환상인지 알수없어지다가 마지막엔 '어...? 이렇게 끝난다고...?'싶게 끝난다. 근데 이게 못만든 결말부를 봤을때 느끼는 어리둥절함과는 달랐다. 이후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면서 이에대한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감독이 요즘 나오는 헐리우드 공포 영화들이 아쉬운 이유가 '너무 완벽하다'는것이었다. 완벽한 설정, 완벽한 전개를 보여주다보니 결말도 완벽해야하고 결국 설정을 지나치게 납득가게 설명해버린다는거.... 이 영화 특유의 불친절함과 미완결적 엔딩은 감독의 이런 가치관에서 나온거구나 하고 납득했다.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다면 결말이 완벽하지 않아도 보는사람이 너그러워지고 이 또한 완성도 높다고 평가하게 된다는것.
난 시나리오 작법을 헐리우드 영화 작법을 통해 배웠고, 장편작품의 느슨함보다 단편작품의 핏함을 좋아해서 헐리우드의 완벽하고 깔끔한 이야기 구성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감독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뭔지도 알겠다.